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의 성씨 (문단 편집) === 중세: 중국식 성씨의 수용 === [[고려]] 때부터 본격적인 한국 성씨의 역사가 시작된다. 성씨는 그 이전부터 쓰였지만 주로 욍족, 귀족이나 중국계 조상을 둔 사람들이 가졌던것을 호족이나 신흥 귀족도 가지기 사작했다는것이다. [[본관]]이 처음으로 도입되고 중국식의 한 글자로 된 단성이 본격적으로 유행하여 '본관 + 단성'의 형태가 주류가 됐다. 특히 1055년 [[고려]] 문종 9년에도 아직 성씨가 없는 귀족층이 많았는데 성씨 사용을 추진하기 위해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는 봉미제도(封彌制度)가 시행되었다. 봉미제도가 시작되고 나서부터 모든 귀족층들은 중국 성씨를 빌려다가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족보가 오래될수록 권위가 높아지는 시대였고 그 권위가 과거 합격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사서 등 옛 서적에 존재하는 중국 성씨와 자신들과 관련이 없는 중국 인물들을 가져다 족보를 만들었다. 이렇게 거의 모든 성씨는 가문의 권위나 역사를 늘리기 위해 실제로 자신들 조상과 혈연이나 관련이 없는 중국 성씨를 빌려다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족보에 존재하는 중국 인물들이 중국 측 기록에는 전혀 등장한 적이 없는 경우가 다수이다. 특히 고려시대 때는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의 금나라에서의 공격과 합병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인은 거란족과 여진족과는 차별성을 두어야 했고 봉미제도까지 시행이 되니 중국에는 기록이 전혀 없는 가공의 인물을 이용하거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족보를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였다. 또한 고려 왕조에서 복성을 가진 자들은 거란식 복성 같다며 중국식 성씨를 하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 고종이 제갈씨가 복성이라며 제씨와 갈씨로 나눈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모화사상으로 인해 혈연이 없는 중국 성씨를 조상으로 삼아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http://www.ytn.co.kr/_ln/0103_201609151102451040|한국인 90%가 가짜 성·가짜 족보?...몰랐던 성씨 이야기]] 특히 고려시대 때는 거란과의 긴장적 대립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거란과 여진에 편입되지 않을 차별화된 성씨가 필요하게 되었고 한민족 토착 대가세족들은 중국식 성씨를 빌려와 족보를 제작하면서 출신 또한 거란과 여진과는 다르게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제작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이러한 기록들이 족보에선 보이나 실제 중국의 기록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다.[*출처 박홍갑, 우리 성씨와 족보 이야기] 또한 조선 중기부터 양민들이 중국 인물을 조상으로 하는 족보 위조로 양인층에게도 성씨가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위조된 족보를 미화하였다. 1764년 중인이었던 김경희가 거짓 중국 인물들을 족보로 위조 판매하다가 발각되었던 사건도 있었다. 15세기 초를 기준하여 한국의 성씨가 총망라된 『[[세종실록지리지]]』소재 성자(姓子)를 당대(唐代)의 ‘군망표’ 소재 성자와 대비해 보면, 전자는 대부분 중국의 유명 성자를 모방한 것이며, 후자에 없는 것은 [[박씨]] 등 16성([[朴]]·[[沈]]·[[河]]·[[玉]]·[[明]]·[[俊]]·[[昔]]·[[諸]]·[[益]]·[[森]]·[[邦]]·[[芳]]·[[價]]·[[勝]]·[[濯]]·[[承]])에 불과하다. 그나마 군망표에 없는 성자도 박씨를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정초#s-8]](鄭樵)의 『[[통지략]]』(通志略) 씨족지에 나타나 있다. 중국 역대에 걸쳐 성씨를 취득한 연원 32가지를 열거하면서 [[국]](國)·[[읍]](邑)·[[향]](鄕) 등 지명을 성자로 한 것이 가장 많고, 명(名)·자(字)로 한 것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박·석·김'''씨와 같은 [[신라]]의 종성은 원래 신라에서 출자한 것이며, [[후삼국시대]] 이래 [[호족(한국사)|호족]]들의 한자성씨화 과정에서 스스로 성씨를 호칭해 놓고 보니 우연히 중국의 성자와 동일한 것도 많았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본격적인 중국식 성씨의 보급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식 성씨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는 성씨의 보급과정을 설명하면서 크게 ① 고려 초 사성(賜姓) 이전의 성씨(삼국 및 가야의 왕실), ② 중국에서 동래(東來)한 성, ③ 고려 초 사성 등 셋으로 나누면서, ①과 ②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③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자료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940년(태조 23)경을 전후하여 전국 군현에 성씨가 분정되었던 것이며, 이는 다음의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1. [[왕건]]은 즉위 이래 개국관료·개국공신 및 귀순호족들에 대한 사성을 광범위하게 실시하였다. 둘째, 신라의 왕가 3성(박, 석, 김)과 6부의 성씨(이, 최, 정, 손, 배, 설), 그리고 한씨, 마씨, 전씨 등 기타 유래 성씨처럼 고려 건국 이전에 성립한 기존의 한성과 중국에서 도래한 외래성을 제외하면 나머지 각 성의 시작은 대부분 고려 초기로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1. 『[[고려사]]』 태조세가에 등장하는 인물을 분석해 보면 태조 23년을 전후하여 그 이전에는 고유명이 주류를 이루다가 그 이후부터는 한식성명이 일반화되고 있으며, 광종을 거쳐 성종대(982∼997)와 현종대(1010∼1031)로 내려오게 되면 고유명을 가진 인물이 관료 계층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성종(10세기 말) 이후가 되면 지방군현의 양민층에게까지 성씨가 수용되고 있었다. 고려 초에 확립된 성씨 체계는 15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분관·분파 등을 통해 성의 분화와 발전이 계속되었던 것이며,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성씨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는데 그것이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중국식 성씨의 수용 및 보급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첫째 왕실과 중앙귀족층에게 수용된 시기는 삼국 말기부터 남북국 말기까지이며, 둘째 지배층 일반에게 중국식 성씨가 보급되어 성과 본관체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 초기이며, 셋째 양민층에게 확대된 시기는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